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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상 속 으 로

사진으로 보는 전 중국총리 주은래의 일생(1)..





35년전의 1월8일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 문앞에 있는 유옌기가 조기 계양되엿다.
이날은 주은래 총리가 사망한 날이다.

반대의 목소리도 있엇다.하지만 당시 유엔사무총장이엿던 발트하임은 이런 말을 한다.

"주은래는 생전에 한푼의 저축도 없엇다.
그리고 한명의 자녀도 없엇다.
앞으로 어느 나라 원수든 이 두가지중 한가지에만 부합되여도 그가 서거하는날 우리 유엔에서는 그를 위해 조기를 계양할것이다.
"


하지만 단 한번도 그러한 이유로 유엔에 조기가 계양되는 날은 없엇다.

주은래,그가 사망한지 35년이 지났지만 그는 지금도 주총리로 불리며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의 사랑을 받고,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니,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졋다
."
주은래 추모비에 씌여있는 비문이다.


그렇다면 주은래는 왜 그토록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을까?


주은래(周恩來: 저우은라이, 1898~1976)는 마르크스주의자, 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이다.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면서 중국인민해방군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이다. 1949~1976년에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총리등직을 역임하였다. 본적은 절강성 소흥(紹興)이고, 강소성 회안(淮安)에서 태어났다.

1898년 강소성 회안에서 태어난 주은래는 어린 시절 모친을 여의고 15세에 남개학교에 입학한다.

고3 시절에는 “거짓은 소수의 사람을 계속 속이거나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속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계속 속이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1919년 5월 4일 일본의 무리한 요구에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웨치고 나선 청년들앞에서 그는 “개혁은 자신부터 시작한다”고 주창하며 “인민의 목을 칠 수 있어도 인민의 머리를 숙이게 할 수는 없다”고 외쳐나갔다.
5. 4운동 중에는 천진 학생계의 대표가 되었으며, 다른 진보청년들과 함께 진보단체인 각오사(覺悟社)를 조직하는등  1920년 체포될 때까지 학생시위와 유인물 발간에 적극 가담하여 중국의 민주화운도의 선봉에 선다.

1920년 가을에 석방된 주은래는  근로장학생제도의 일환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그후 주은래는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근공검학을 하며 중국의 미래를 개척할 길을 탐색한다.당시 많은 중국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주의를 중국 구국의 대안으로 생각한 그는 적극적으로 마르크주의를 연구한다.


1921년봄,장신부,유청양의 소개로 베를린에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다.

1922년에는 조세염(趙世炎: 공산당 초기 주요 인물) 등과 유럽 중국소년공산당(이듬해 중국사회주의 청년단 유럽 지부로 개명하였음)을 조직하였다.

그 후 중국사회주의 청년단 유럽 지부 서기, 중국공산당 유럽 지부장을 역임하였다.

1924년 가을, 중국으로 돌아간 주은래는 손문이 영도하는 국민당의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국민혁명군 제1군 정치부 주임, 제1군 당부대표 등을 역임한 다음, 계속하여 중국공산당 광동지역 위원회 위원장, 상임위원 겸 군사부장을 역임하였다.
 
1927년 3월 북벌을 시작한 국민혁명군이 상해 인근에 도달하자, 상해 노동자들의 제3차 무장봉기를 영도하여 상해에 주둔하고 있던 북양군벌 부대를 몰아내었다.

5월 중국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에 당선되었으며, 5기 1중전회에서는 중앙정치국 위원에 당선되었다. 7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임시 상무위원회 위원(총 5명)을 역임하였다.


1925年8月8日,주은래는 자신의 평생의 동지이자 반려자인 등영초와 결혼한다.

중국에서 주은래가 가장 존경받는 이유중의 하나가 등영초에 대한 주은래의 사랑이다.

등영초와 주은래의 첫만남은 1919년 5.4운동 시기엿다.당시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주은래는 천진햑생들사이에서 유명인사엿다.등영초도 북양직예여자사범학교에 공부하고 있엇으며 여자애국동지회'의 일원으로 학생운동에 활발하게 참가 했다.연극을 좋아한 주은래와 등영초는 연극활동에 활발히 참가햇는데 여학생이 없는 남자학교에서 주은래는 여자역을, 여자학교에서 등영초는 남성의 연극을 하며 우연이 아닌 인연을 만들엇다.주은래는 당시 등영초 등 여학생들의 연기지도를 하기도 하면서 등영초와 인연을 만들엇다.당시 등영초의 나이는 15세엿다.

이듬해 프랑스에 유학을 떠난 주은래는 예쁜여인과 연애를 한다.하지만 자신과 이념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잇고 자신이 혁명을 하는데 좋은 동지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낀 주은래는 유럽에서 등영초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영원히 평생의 반려자로 혁명동지로 함께 할것을 약속한다.

외모가 아닌 사상과 이념 인품을 택한 주은래의 선택은 정확했고 주은래와 등영초는 모두 중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된다.

주은래의 선택은 탁월했다.등영초는 중국민중의 어머니라 불리며. “목숨이 있는 한 계속하여 투쟁한다”고 하며 폐결핵의 병든 몸으로 최후까지 인민과 함께 고락을 나누었다. 자식이 없는 그녀에게 “아이가 없어 외롭지 않나요?”라고 질문하면 “중국의 아이들이 모두 내 아이들이다”라고 답할 정도로 그녀의 그릇은 컸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부분은 바로 그녀의 유언이다. 허름한 집에서 일생을 마치고 납골 상자도 남편과 함께 사용함으로써 절약을 끝까지 실천한 그녀의 유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장례를 간단히 하고 희망이 없을 때는 의료 직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응급조치를 취하지 마세요. 나와 주 총리가 쓰던 집은 국가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분배하세요. 우리 부부는 우리가 살던 곳을 유적으로 남기는 것을 반대해 왔습니다. 책들은 청소년이 열람할 수 있도록 도서관에 보내주세요. 유물이 있으면 모두 공공기관에 기탁바랍니다. 개인 유물, 옷, 잡다한 물건들은 몸에 맞는 주변 동지들과 친지들에게 사용하게 해주세요.”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못했다,그는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아내이며 가장 존경하는 여인이기 때문이다.

1927년국공합작이 결렬된다. 주은래 하룡(賀龍), 엽정(葉挺), 주덕(朱德), 유백승(劉伯承) 등과 함께 8월 1일 강서성 남창(南昌)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다.이후 중국 전역에서 공산당이 지도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중국혁명이 새로운 시기에 들어선다.

후일 중국공산당은 이날을 중국인민해방군 창건의 날로 정한다.남창봉기가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1928년 주은래는 중국공산당 6기 1중전회에서 정치국 상임위원에 당선되며, 그후 중앙조직부장, 중앙군위 서기를 역임한다.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은 상해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의 안전을 보장하고, 각지의 공산당 무장투쟁을 지도하며, 국민당 통치구에서의 혁명사업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실질적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의 주요 책임자였다.

 

1931년 이후 중국공산당 소비에트지구 중앙국 서기, 중국 공농홍군 총정치위원 겸 제1방면군 총정치위원,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1933년 봄, 주덕과 함께 홍군을 지휘하여 국민당 군대의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한 제4차 토벌을 물리쳤다. 1934년 10월 장정에 참가하였다.

 

1935년 1월, 귀주성 준의(遵義)에서 거행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즉 준의회의)에서 모택동(毛澤東)의 주장을 지지하고, 모택동이 군을 전두지휘하도록 한다.만일 이시기 주은래의 지지가 없엇다면 모택동이 중공의 1인자 자리에 오르는 일은 없엇을지도 모른다.자신이 일인자 자리에 오를수 잇음에도 불구하고 탁울한 군사적재능을 가진 모택동을 중국혁명을 지휘할수 잇는 적임자로 보고 그를 지지한 주은래의 사심없는 행위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1936년 12월, 당시 섬서성 서안(西安)에 주둔하고 있던 장학량(張學良)과 양호성(楊虎城)은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키고 장개석(蔣介石)을 구금한다.그리고 내전을 종식하고 일제히 항일할것을 주장하는 선언문을 발표한다. 주은래는 중국공산당 전권 대표에 임명되어 진방헌(秦邦憲), 엽검영(葉劍英) 등과 함께 서안으로 가서 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일제히 항일을 하기위해 장개석과 협상을 벌였다. 마침내 장개석으로부터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항일하자"는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냄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항일전쟁 시기에 주은래는 중국공산당을 대표하여 장기간 중경(重慶)과 국민당 통치 지역에 머물면서 통일전선 과업을 수행하고, 각계의 항일 역량을 결집시켜 중국공산당 중앙 장강국(長江局)과 남방국(南方局)의 임무를 영도하였다. 그는 국공합작을 견지하고, 민주당파, 진보적 지식인사, 애국인사, 국제우호인사들을 적극적으로 결속하여 반공의 역류를 제지하고 국민당이 적극적으로 항일전쟁에 참가하도로 유도한다.


1939년
7월,주은래는 낙마사고로 오른팔이 분쇄성골절상을 입는다.이 사고로 주은래는 오른팔을 제대로 사용할수 없게 된다.


1945년 중국공산당 7기 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서기처 서기에 당선되었다.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그는 내전을 제지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 대표단을 이끌고 국민당과 협상을 진행하였다.하지만 담판은 결렬되고 1946년 여름 전면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1946년 11월19일 대표단을 이끌고 연안에 돌아온 주은래는 중앙군위 부주석 겸 총참모장 대리를 역임하며 국민당의 통치를 뒤엎는 중국의 혁명을 지휘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주은래는 줄곧 정부 총리를 역임하면서 외교부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 및 주석, 중국공산당 중앙 부주석, 중앙군위 부주석 등을 겸임하였다. 

중국의 국민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처음 몇 개의 5개년계획은 모두 주은래의 주관 하에 제정되고 조직적으로 시행되었다. 주은래는 경제건설은 반드시 안정적이고 균형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외에도 주은래는 사회주의 시기의 통일전선 사업과 지식인 사업, 과학문화 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