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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상 속 으 로

사진으로 보는 주은래의 일생(2)




 

주은래는 탁월한 외교가엿다.

1949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사이 주은래는 모택동고 함께 소련을 방문한다.2월14일에는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고 러시아의 지지를 얻어낸다.

1954년  제네바회의에 참석한 주은래는 인도차이나 문제를 해결하고, 베트남(남방 제외), 라오스, 캄보디아의 독립을 위한 국제적 승인을 얻도록 하엿다. 주은래가 제창한 평화공존 5개항 원칙은 오늘날 국제관계의 기준이 되엿다.

1955년 아시아 아프리카 29개국이 인도네시아에서 거행한 "반둥회의"에서 평화공존을 주장하고 식민주의를 반대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각국을 순방하고, 세계 각국의 지도자와 우호인사들을 접견함으로써 우호증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71년 7월 미국 특사 헨리 A.
키신저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를 처음 만난 후 외교관·협상가로서 그의 명성은 미국 언론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주은래는
키신저와 교섭하여 192년 닉슨과 모택동의 정상회담을 성사시킨다.이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나온것이 그 유명한 핑퐁외교다. 1975년 월남전을 종식시킨 파리회담을 성립시킨 공도 그의 몫이다.  

닉슨은 후날 72년 첫 중국 방문 당시 주은래는 자신이 암을 앓고 있으며 언제 죽게 될 지 모른다고 말하고 자신이 죽기 전에 미국과의 수교를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중국인들이 주은래를 존중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주은래의 검박합이다.


일화로  외국을 방문한  그의 셔츠가 뜯어져 대사관으로 수선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옷을 본 중국 외교관의 부인은 눈물을 멈출수가 없엇다.총리의 셔츠는 너무도 기워 그 원색을 찾아볼수가 없엇기 때문이다.
실제 중국의 주은래 기념관을 방문하여 그가 생전에 입었다는 옷들을 전시해놓은 것을 본다면 이것이 일국의 총리의 유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것이다.


주은래는 항상 외국으로 출국할때 하나의 가방을 들고 다닌다.모르는 이들은 그 상자에 아주 중요한 기밀 문서가 들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주 총리의 낡은 옷과 그의 혼이었다. 그의 가방에 중요기밀이 있을것이라 생각되여 그의 가방을 뒤졋던 외국의 정보요원은 가방속에 있는 옷가지를 보고 경악을 멈추지 못했다고 한다.


주은래는 '격려의 천재'라고 한다. 비판이란 행위 자체가 일상화되어 있는 공산당 활동 속에서 모택동이 엄한 아버지였다면 주은래는 자애로운 어머니었다.


주은래는 『자신의 유해를 화장해 조국 산하에 뿌려달라』는 말을 남기면서 지난 76년 세상을 떠났다.

등소평은 당시 장례위원장을 맡아 주의 영결식을 주관했다. 주은래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해 등소평이 비행기를 타고 직접 전국을 돌며 흩뿌린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인민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주은래 총리는 중국 전토에 자신의 뼈를 뿌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