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英雄者,
有
熊之莊,豹之膽,虎之猛,龍之威,
胸懷大氣,氣傲云天,
不戚戚于貧賤,不汲汲于富贵,
飞腾于宇宙之间,潜伏于波濤之中。
有
包藏宇宙之机,吞吐天地之智
대한민국 역사에 이러한 영웅은 누구일까요
연개소문?이순신?아니면....
솔직히 제 마음속 최고의 영웅은
1. 한반도 통일의 초석을 다진
김춘추와 김유신.
김춘추[金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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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 혹은 龍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보필하여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다.
642년(선덕왕 11년)에 대야성이 백제에게 함락되면서 사위인 김품석(金品釋)과 딸이 죽자 김춘추는 백제에 원한을 갚기 위해 본격적으로 외교활동에 뛰어들었다. 처음에 김춘추가 외교 협상을 벌이려 한 것은 고구려였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의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진흥왕 때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공취한 한강 상류유역의 영토 반환을 요구하면서 오히려 김춘추를 억류하였다. 겨우 고구려를 탈출한 김춘추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당나라로 건너가 외교적 협상을 벌였다. 김춘추의 활약 덕분에 마침내 당태종은 백제 공격시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였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진골 신분으로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제29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구서당(九誓幢)이라는 9개 군단(軍團)의 설치로 군사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아들인 김인문과 김문왕 등을 당나라에 보내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외교적으로는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고구려·백제와의 전쟁을 위한 군사적인 준비를 하였다.
655년(무열왕 2)에 고구려가 백제·말갈과 연합하여 신라 북경지방의 33성을 공취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고, 이에 당나라의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의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또한 659년에는 백제가 자주 신라의 변경지방을 침범하자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여 본격적인 백제 정벌을 착수하였다.
660년 마침내 당나라에서 소정방에게 13만명의 군사를 주어 백제로 보내자 무열왕은 태자 법민과 유신·진주·천존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 5만명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나당연합군의 협공에 사비성이 함락되고 이어서 웅진성으로 피난하였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 융이 항복함으로써 마침내 백제는 멸망하였다. 11월에 백제로부터 귀환한 무열왕은 백제 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또한 항복해 온 백제의 관료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주어 관직에 임명하였다. 이듬해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성을 공격하자 신라군을 파견하는 한편, 말갈과 함께 신라를 침범하는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힘썼다.
고구려 정복은 다음 문무왕대로 넘어갔지만 태종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
김유신[金庾信]
시 대 : 신라
생몰년 : 595년(진평왕 17)~673년(문무왕 13)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장군·대신.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김무력(金武力),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으로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 아버지는 숙흘종이다. 아내 지소부인은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이었는데, 지소부인과의 사이에는 삼광·원술·원정·장이·원망 등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삼국통일전쟁기에 장군으로 활약한 김흠순(金欽純)은 그의 동생이다.
15세 때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로 불린 낭도를 이끌었다. 그가 세운 큰 전공으로 전하는 것은 629년 34세 때부터 나타난다. 당시 신라군은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했는데, 1차 접전에 패배하여 전의를 잃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중당당주로 출전하여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654년 태종무열왕 즉위 후 그의 정치적 비중은 더욱 높아져 즉위 다음해의 관등이 대각간으로도 나타난다. 660년 정월에는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어, 그는 삼국통일 전쟁과정의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해에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함께 황산전투에 참가하여 처음에는 백제의 계백이 이끄는 5천의 결사대에 고전하였으나 관창 등 화랑 출신 장수들의 분투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당나라 군대와 함께 사비성 공격에 참여하여 7월 18일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백제를 멸하였다.
김유신은 이어 661년(문무왕 1) 6월 고구려를 원정하였다. 이 원정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군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한 당나라 군대를 지원하려고 고구려 중심부까지 왕복하는 결사적인 수송 작전을 하고, 당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이듬해 정월에 고구려군의 매복과 추격을 물리치고 돌아왔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에 신라군의 총사령관이라 할 대총관이 되었다. 그러나 늙고 쇠약하여 병으로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수도에 남아 왕까지 원정을 떠난 신라 국내의 통치를 대신 담당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당나라의 대국주의 야욕을 경계하고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660년에는 백제군의 결사대를 격파하느라 당나라군과의 합류지점에 늦게 도착함을 빌미로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신라 장군의 참수를 명하여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자, 그는 단호히 먼저 당나라군과 결전하겠노라 맞서 소정방의 기도를 꺾은 바 있다. 국제관계 속에서 당나라가 신라에 대해 노리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당나라의 침략을 분쇄할 수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고구려 땅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심지어 신라 본토에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두어 삼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당의 침략행위에 대한 투쟁에서도 김유신은 지도적 역할을 했다. 아들 원술(元述)이 당군에게 패배하고 돌아오자 참수할 것을 주장하여 결전의 의지를 보였으며, 672년 석문(石門) 벌판전투에서 신라군이 당에게 패배하고 있을 때 문무왕에게 전략을 자문하기도 했다. 결국 신라군은 그가 죽은 뒤인 676년 당의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673년 가을 79세로 죽었다. 유해는 금산벌에 장사지냈고, 문무왕은 유사(有司)에게 비를 세워 공과 명예를 기록하고 거기에 거주할 민가를 정해 묘소를 지키게 했다.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 경주의 서악서원에 제향되었다. 현재 김유신의 묘는 경주시에 있으며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의 진천 길상산은 고려 때 태령산으로 불리었고, 태를 안치했다 하여 신라 이래로 김유신사를 세워, 봄·가을로 국가에서 향을 내려 제사하게 했음이 전해지고 있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
2. 강대한 수나라에 맞서 수양제가 이끈 수나라를 물리침으로서
후일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라는 이세민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왔음에도
충분히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고구려의 대막리지
을지문덕장군.
604년 문제의 둘째 아들 양광이 수 양제로 등극하였다. 양제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대흥성 공사와 낙양성 공사를 벌이고, 대운하와 만리장성을 건설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양제는 돌궐의 계민가한에게 충성을 맹세 받은 뒤인 611년 음력 2월, 고구려 정벌을 결정했다. 이에 엄청난 양의 세금을 거둬야 했으며, 전선을 하루종일 건조하느라 열에 서너 명이 배에 구더기가 생기는 병에 걸렸다고 한다. 또한 온 나라의 말과 식량, 병기등의 물자를 탁군으로 옮겼다. 이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양제는 이를 모두 진압하였다.
612년 음력 1월, 수 양제의 원정군이 탁군을 출발하였는데, 그 수가 113만 3800명이었다. 또한 말 10만 필과 수송병을 합하면 그 수가 정규군의 2배나 되었다. 수군 또한 10만 명이었다. 수나라 군대는 배다리를 통해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두 번째 공격에서 수나라 군은 도강에 성공하여 고구려 군 1만여 명을 죽이고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막강한 저항으로 6개월이 지나도록 요동성을 위시한 고구려의 성 한 곳도 함락당하지 않았다.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 침공에 돕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한편 양제는 요동을 포기하고 별동대를 편성해 평양성을 곧장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한편,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은 약속한 날짜에 평양을 공격할 수 없게 되자 수군 단독으로 평양을 공격하였으나 왕제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 군에 의해 참패하였다. 이 소식에 양제는 군을 24군에서 9군으로 군대를 개편하였다. 음력 6월에 우중문(于仲文)이 이끄는 30만 5000명의 수나라 군이 평양으로 진군했다. 수나라 병사들은 100일 치의 양식을 등에지고 행군을 했는데, 군사들이 피로와 더위에 지쳐 군량을 버리기도 하였다. 결국 나중에는 식량이 부족하여 평양에 닿기도 전에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또한 을지문덕이 청야 전술을 지시하여 어디에서도 식량을 찾을 수 없었다. 수나라 군중에 탈영병과 전염병자가 속출했다. 압록강 일대를 방어하던 을지문덕은 주민들을 모두 성 안으로 옮기고, 가축이나 식량을 감추었으며, 성 외에 있는 우물을 메워 적들의 식량 공급을 차단하였다.
영양왕은 을지문덕에게 거짓항복을 하여 수나라 군의 군세를 엿보게 하였다. 양제는 을지문덕이 진중에 들어올 경우 무조건 생포할 것을 지시하였다.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으로 수나라 군 진영에 들어가 수나라 군대를 엿보았다.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 의사를 표명하고 자리를 뜨려하자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사로잡으려 하였으나, 유사룡이 무례한 행동이라 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보내주었으나 곧 계략임을 눈치채고 사람을 보내 다시 잡으려 하였으나 을지문덕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 후 수나라 진중에서는 퇴각을 주장하는 우문술(宇文述)과 계속 진군 해야한다는 우중문 사이에 충돌이 있었으나, 총사령관인 우중문의 지시에 따라 수나라 군은 압록강을 건너 진군을 계속하였다.
을지문덕은 소규모의 군대를 지속적으로 수나라 군을 공격하게 하여 수나라 군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하루에 7번 싸워 모두 승리하게 해주었다. 승리에 도취한 우중문은 평양성 30리 밖까지 진격하였다. 을지문덕은 이때 우중문에게 사자를 보내 시를 한 편 보냈는데, 이 시가 바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이다. 또한 우문술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영양왕이 황제에게 항복을 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우문술은 우중문을 설득하여 요동으로 퇴각할 것을 지시했다. 을지문덕은 퇴각하는 수나라 군에게 공격할 것을 명했다.
결국 수나라 군은 살수(薩水))에서 물을 만나 퇴각 속도가 더디게 되었다. 고구려 군은 이를 노려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를 두고 을지문덕이 수공으로 적을 전멸 시켰다고도 한다. 이 전투를 살수 대첩이라 부른다. 한편, 이 전투에서 우문술은 자신의 부장 신세웅과 그가 이끄는 8군이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전사하는 등 참패를 당하며 요동으로 돌아간 적의 숫자는 2700명에 불과 했으며, 수나라의 지휘관들은 우중문과 우문술을 포함하여 대부분 패배의 책임을 물어 포박지어 압송되었지만, 유독 우문술의 부장 설세웅만은 갑옷이 무겁다는 이유만으로 벗어던지고 종횡무진 활약했다 하여 면죄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이후 남은 군사에 상관없이 수나라 군은 8개월 만에 퇴각을 개시하였다. 이로써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
3. 훈민정음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를 만들어 漢字를 사용하던
우리민족에게 자신만의 문자를 가져다준
세종대왕
다른 위인들도 많지만 그들이 한반도와 우리민족에 미친 영향력으로
이분들이 우리 민족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 아닌가 싶네요.
당신 마음속의 영웅은 누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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