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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격동의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한 불타는 흥왕사, 그리고 '주인을 문 개' 홍복원,조숙창의 아이러니한 승승장구

고려와 운명을 함께한 불타는 흥왕사

몽고군의 만행으로 불타는 흥왕사, 그 참담한 광경이 곧 고려의 현실이였다.

팔만 대장경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후세에 남긴 고려, 불교의 나라답게 몽고의 칩입에 눈 한번 깜짝을 하지 않던 고려의 실질적인 지배가 최우가 혼비백산을 한다.눈물의 항복을 선택을 해야 했지만 고려 불교의 상징이였던 흥왕사는 그 비참한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몽고의 침략에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겪어야만 했던 흥왕사, 그 불교사찰의 흥망성쇠가 고려의 운명과 함께 하며 고려의 역사를 지켜보고 고려의 패망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경기도 개풍군(지금의 개성 개풍군)봉동면 흥왕리 덕적산 남쪽에 있던 절 흥왕사,고려시대에 국력을 결집해 창건한 절로, 대장경 주조와 함께 기복불교를 대표했던 거찰이다.

고려 문종의 원찰(願刹)로 1056년(문종 10) 2월에 택지하여 1067년 1월에 완공되었다. 절의 규모는 2,800칸에 이르렀다. 이 절은 초대 주지 의천이 속장경을 간행했던 곳으로 유명하며, 1087년(선종 4) 속장경 간행과 연관이 있는 대장전을 건립했다. 그뒤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가 금 200근으로 13층탑과 화병을 조성하여 헌납했다.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여러 번 중창했으며, 1330년(충숙왕 17)부터 정조(晶照)·달환(達幻) 등이 9년간 중창하여 그 이전의 면모를 되찾았다.

1486년(성종 17)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고적(古蹟)조에 이 절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선초에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있었으며 절터에는 초석, 이끼 낀 와당, 남문지(南門址) 밖의 입석(立石)만이 남아 있다.(출처: 다음 백과사전)

몽고의 침략에 투항을 선택한 조숙창과 홍복원, 여몽전쟁을 계기로 한사람은 고려에서 한사람은 몽고에서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상상을 뒤엎는 인생을 살아간다.

적에게 투항을 하고도 승승장구를 한 조숙창

평장사 조충(趙沖)의 아들로 몽고의 장수마저 탄복을 하는 명장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무서워 항복을 선택한 조숙창,  고종 18년 함신진(咸新鎭) 방수 장군(防戍將軍)으로 몽고의 살례타이가 “나는 몽고 장수다. 너희들은 속히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도륙하겠다!”라고 위협을 가하자 겁을 먹고  부사 전간(全間)의 “만약 나가 항복하면 성중의 사람들이 죽음을 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감언리설을 명분으로 투항을 한다. 

 “나는 원수 조충(趙沖)의 아들이다. 우리 아버지가 일찍이 귀국의 원수와 형제를 맺은 일이 있다”라며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해가며 목숨을 구걸한 조숙창, 삭주 선덕진(朔州宣德鎭)을 설복해서 항복을 하게 하는 등 몽고인들이 앞장에 서서 “진짜 몽고다. 속히 나와서 항복하라!”라고 외친 조숙창, 백성들을 위해 투항을 하였다고 웨치는 그는 대표적인 투항파다.

후날 고려의 대장군으로 승진되어 몽고에 가서 사신 저고여(著古與)의 살해사건을 밝히는 표문(表文)을 올린것은 물론, 이듬해 상장군에 올라 시어사(侍御史) 설신(薛愼)과 함께 칭신(稱臣)하는 표문을 올렸다.

여몽전쟁에서 몽고군에 투항을 한것을 계기로 아이러니하게도 승승장구를 거듭한 조숙창, 결국은 후날 필현보의 역모에 연루되여 처절한 죽음을 맞이한다.

조숙창의 아이러니한 승승장구, 그 당시 고려조정에서 몽고의 위세와 투항파의 입김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려를 망국의 위기로 몰아넣은 홍대순 홍복원 일가

몽고군이 고려로 쳐들어오자 자발적으로 투항을 하고 길잡이로 나선 홍복원, 사실 그 선봉에 선 인물은 홍복원이 아닌 그의 아비 홍대순이다.

1218년 몽고에 투항을 한 홍대순은 몽고에 항복을 하고 가족을 고려에 남겨둔채 몽고로 건너간다. 1231년 몽고의 침략으로 여몽전쟁이 일어나자 자발적으로 길잡이가 되고 고려침략의 선봉에 선 인물이다.

당시 서경 낭장이였던 홍대순의 아들 홍복원은 샬리타이가 쳐들어오자 항복을 한다.

몽고군에 항복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관리로 고려에 남아있던 홍복원은 1233년 평안북도일대에서 일어난 반란을 계기로 필현보(畢賢甫) 등과 함께 선유사인 대장국 정의와 박녹전을 죽이고 성을 빼앗아 반란을 일으킨다.

최우가 3000의 가병을 파병하여 북계병마사 민희와 함께 반란을 진압함으로서 , 실패한 홍복원은 몽고로 도망을 치고 , 후날 몽고의 파견으로 통경총관에 부임되여 고려군민을 다스리는 관직에 올라 또 다시 고려를 괴롭힌다.

앞장에서 원의 조정에 고려의 무신정권을 비방한 홍대순 홍복원 부자, 무신정권의 지배자엿던 최우는 결국 그들을 달래여 홍대순을 대장군에 임명하기에 이른다.결국 고려에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던 홍대순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은청광록대부로 승진 상서좌복야 응양군상장군에까지 이른다.

홍대순,홍복원에 이어 홍복원의 아들인 홍대구는 물론 손자인  홍중희(洪重喜)·홍중경(洪重慶) 형제까지 4대에 이르러 고려를 망국의 위기에 빠뜨렸던 홍씨일가, 조국을 배반하는 만행에도 불구하고 천벌은 그들을 비껴간듯하다.

다행인것은 홍복원이  영녕공 준(永寧公綧)과의 관계악화로 원의 황제가 보낸 장사 10여명에게 물매를 맞아 비명을 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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